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응우옌 왕조 (문단 편집) === 프랑스의 보호령 === ||[[파일:박닌전투.jpg|height=230]]||[[파일:300px-Signature_of_1883_Treaty_of_Hue.jpg|height=230]]|| || [[청프전쟁]]의 기록화 || 후에 조약의 체결 모습 || 이어서 1883년 제1차 후에 조약([[계미]] 조약, 아르망 조약)으로 베트남은 프랑스의 보호령이 되었다. 남부의 빈트안을 코친차이나 식민지에 할양하고, 북부의 타인호아, 게안, 하틴의 3성을 통킹에 편입하며, 안남 지방은 응우옌 왕조의 황제의 통치를 인정하지만 관세, 토목은 제외하며, 수도 후에에는 프랑스 대사관을 둘 것, 통킹은 보호령으로서 실질적으로 프랑스의 관리하에 둘 것 등이 후에 조약의 주요 내용이었다. 한편 당시 응우옌 왕조는 내부도 엄청나게 어지러운 상황이었는데, 응우옌 왕조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재위한 [[뜨득 황제]]가 승하하자 그의 뒤를 이어 양자 [[죽득 황제]]가 제위에 올랐다. 그러나 죽득 황제는 3일 만에 보정대신들에게 쫓겨나 감옥에서 아사했고, [[히엡호아 황제]]가 새롭게 즉위했다. 히엡호아 황제 즉위 후에도 응우옌 왕조 내부의 갈등은 그치지 않아서, 섭정들 사이에서 내란이 일어나 서로 다투는가 하면 정부의 고관이었던 판딘풍(潘廷逢, 번정봉,1847 ~ 1895)이 섭정들의 패악을 문제삼아 대대적인 충돌을 일으키는 등 후에의 조정에서는 바람 잘날이 없었다.[* 참고로 판딘풍은 보정대신들의 세력에 밀려 결국 고향으로 귀양을 갔고, 판딘풍은 이 곳에서 세력을 길러 이후 프랑스에 대항하는 혁명군을 이끌었다.] 당시 조정의 권력은 보정대신이었던 응우옌반뜨엉과 똔텃투옛, 쩐띠엔타인이 장악하고 있었고, 히엡호아 황제는 허수아비에 불과하였다. 응우옌반뜨엉과 똔텃투옛은 전횡과 발호를 일삼아 히엡호아는 이에 매우 불만을 품었다. 히엡호아는 프랑스인이 제시한 보호 정책을 받아들여 강대한 보정대신들에 대항하고자 하였다. 응우옌반뜨엉은 이를 알고 자유태후(慈裕太后, 현유태후, 1810 ~ 1902)에게 주청을 올렸고, 11월 29일에 정변을 일으켜 쩐띠엔타인을 죽인 뒤 히엡호아를 폐위하고 [[끼엔푹 황제]]를 옹립하였다. 히엡호아는 육덕학당(育德學堂)에 감금되었다가 핍박을 받아 독주를 마시고 사망하니, 재위기간은 4개월이었다. 1884년 6월 6일에는 제2차 후에 조약([[갑신]] 조약, 파트노톨 조약)을 체결하여 프랑스의 대표인 [[총독]]이 베트남의 외교권을 총괄하고, [[후에 황궁]]에 프랑스 수비대를 상주시키는 것 등을 추가하였다. 이때부터 베트남은 '''[[안남]]'''(Annam, 安南)국이라는 이름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 2차 후에 조약으로 인하여 응우옌 왕조는 약 83년 간의 독립국으로서의 역사를 끝내고 완벽한 프랑스의 보호국이자 식민지로 전락하였으며, 이후 즉위한 황제들은 모두 프랑스가 임명한 말 그대로의 얼굴마담이었다. 참고로 안남국이라는 새로운 이름은 안남이 과거 [[당나라]]가 베트남을 지배하기 위해 설치했던 안남도호부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을 이용한 프랑스의 노림수였다. 안남은 지방 이름으로 사용될 때는 수도 후에를 포함한 중부 지방을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베트남 전체를 의미하는 의미로도 프랑스 서적에서 자주 사용되었다. 그러나 당시 청나라의 실권을 쥐고 있던 [[서태후]]가 ‘베트남을 프랑스에게 넘길 수는 없다’는 훈령을 발표하고, 통킹 주둔군의 철수를 거부하면서 1884년 8월 6일 청의 선전포고로 프랑스와 청나라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이것이 바로 [[청프전쟁]]이다. 이 전쟁은 청나라가 우세한 상황이었으나 장기전에 따른 피해를 우려한 [[이홍장]]이 화의를 제의했다. 최종적으로 화의를 통해 프랑스가 청나라에 어떠한 요구도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전쟁을 끝냈다. [[영국]], [[미국]], [[독일]]의 중재로 청나라는 1885년 6월 9일 프랑스와 제2차 톈진 조약을 맺고 안남(황제가 다스리는 중부)과 통킹에 대한 프랑스의 보호권을 승인하고, 베트남의 두 곳을 청나라와 프랑스의 무역지로 지정하고,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을 포기하였다. 그 외 중국 내부로 오는 프랑스 화물은 베트남과 광서 변경에서 관세율을 감하기로 하고, 이후 청나라에서 [[철도]]를 건설할 때 프랑스와 협상하기로 하였다. 참고로 프랑스가 각종 조약들을 통하여 베트남의 실권을 완벽하게 장악한 직후였던 1885년 7월에 보정대신 똔텃투옛은 프랑스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히엡호아 황제를 죽인 이유부터가 친프랑스 정책을 펼쳤다는 것이었으니 당연히 똔텃투옛은 프랑스와 사이가 좋을 리가 없었다. 어차피 가만히 있으면 프랑스 관리들에게 밀려날 상황이었고, 그래서 차라리 프랑스에 반기를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화력의 열세 때문에 프랑스 군대를 이기기에는 무리였고, 똔텃투옛은 허수아비 황제이자 반프랑스 정서를 공유하고 있던 [[함응이 황제]]를 데리고 고산지대로 도망쳤다. 똔텃투옛은 함응이 황제를 틀어쥔 채로 근왕파들의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민족주의자들과 반프랑스 세력들이 화답하면서 반란의 규모는 꽤나 커졌고, 이를 껀브엉 운동(勤王運動, 근왕운동)이라고 부른다.[* [[존왕양이]]와 차이가 존재한다.] 프랑스는 무려 11년이 지나서야 껀브엉 운동을 진압할 수 있었고, 똔텃투옛은 중국으로 도망쳤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